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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시조시인 민동선, 시인 이정기ㆍ홍성문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19.05.09 04:44 수정 2019.05.10 04:44

민경탁(시인)

ⓒ 김천신문
1919년 4월 13일 문경 산북 김룡사의 스님과 학생 30여 명이 산문을 나섰다.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바로 그날이다. 태극기를 몰래 숨긴 스님들은 산문을 나서 대하리를 향해 걸었다. 운달산 계곡 옆길을 따라 걸었다. 장날에 맞춰 일본경찰이 주둔한 대하주재소 근처에서 조선독립을 외치기 위함이었다. 이 중 한 명인 민동선도 태극기, 독립선언문, 경고문을 감춰 절을 나섰다. 하지만 행진은 도중에서 멈췄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김룡사 지방학림 교장이며 주지인 김혜옹 스님이 조랑말을 타고 급히 달려와 만류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사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김룡사 지방학림 만세사건이다. 김룡사 전장헌의 주도로 송인수, 성도환, 최덕찰, 민동선, 김훈영 등이 가담한 독립만세 운동이었다. 다음날 이들 27명은 일본헌병에 연행되어 10일간 모진 고초를 겪었고 4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았다. 민동선의 회고록(1969)과 불교신문에 전하는 역사이다.
김천에서 최초로 현대시조를 쓴 사람은 민동선(閔東宣 1902 - ? )이다.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안심사, 김룡사에 있었다. 호가 향은(香隱)이다. 1920년대 말부터 시조를 써 월간 “불교”지에 발표했다. 경북문학사에서는 김천의 민동선과 영양의 조애영(趙愛泳 1911-2000)을 경북 시조문학의 여명기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조애영은 시인 조지훈의 고모이다. 두 시조시인은 경북문학 태동기의 대표적 시조시인이다. ‘달빛이 곱습니까 꽃빛이 곱습니까/하고한 많은 중에 대광명은 한글이심/겨레야 누리 다 하도록 물려물려 지키자//’(민동선, “한글 경판 뵈옵고”에서. 1932). 이육사가 자유시 ‘황혼’으로 “신조선”지에 등단하기(1933) 전 민동선이 쓴 현대시조이다. 민동선은 1950년대 초반 김천고보(현 김천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김천에서 최초로 자유시를 쓴 사람은 이정기(李廷基 1927-2001)이다. 김천 대항면 향천리 태생 이정기는 1947년 여름 김천 오동시문학구락부의 “오동”지(창간호)에 김천농업중 학생으로 ‘사랑’이란 자유시를 발표했다. 호를 草谷 또는 一史 또는 夫里로 썼다. 1948년에 첫시집 “발자욱”(대한민국 청년단 김천부, 1948. 12)을 냈다. ‘가을의 나뭇잎/붉은 깃발을 날리는/깊은 산/고요한 기슭에/썩은 지붕 모인/저기 정든 곳/지금은/여윈 오반의 연기가/바람도 없이/흔들리며//이미 추수는 짙어/앞들 두렁마다/금빛 용이 휘휘/꼬리를 치는데/늙은 햇살은/내리어 내리어/비인 논틀이/그 밑에서/긴 피로를 푼다//’(이정기, ‘고향의 오반’ 제2, 3연 - “발자욱” 1948). 이에 자극을 받아 같은 마을의 김천중 재학생 홍성문(1930-2014)이 이듬해 시집 “발자욱”(김천교도소 인쇄부, 1949. 11)을 냈다. 이정기의 시집 “발자욱ㆍ1”, 홍성문의 시집 “발자국ㆍ2”가 연차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보다 훨씬 뒤 대구에서 오성고 학생 김원중과 경주고 학생 서영수가 학생 2인시집 “별과 야학”(범조사 1957)을 냈다.
이정기 시인의 인생과 문학 여정은 드라마틱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서울대 학생신분으로 김천에서 체포, 김천형무소에 수감, 총살형이 집행됐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면서 노무자, 통역관, 영어 교사, 출판사 집필원, 교수 등의 직업을 거쳤다. 1965년부터 국민대에 상주시인 겸 전임교원으로 출발, 이 대학 영문학과에 재직하면서 영국 런던 응용학술원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풍은 스케일이 크며 호탕 분방하여 멋스럽다. 그의 장시(長詩) 중에 민족 집단의 원형 부활을 노래한 “노실고개의 해당화”가 있다. 이 시에는 김천의 노실고개가 한민족 삶의 근원적인 터전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러나 님은 연꽃봉오리에서/되살아나온다는 막막한 소문이 있어/나는 성거산 노실고개 마루에서/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네//’(이정기, 제4시집 “노실고개의 해당화” 서문에서. 1974). 그는 인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말년에는 종족과 인류세계를 종합하여 노래한 문화비평 장시를 개척했다. 5개 국어에 능통했던 이정기 시인은 한국현대시인협회장, 국제펜클럽 한국 전무이사를 지내며 국내외에서 시문학계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시, 소설, 비평, 수필 등 장르에 구애됨 없이 많은 글을 남겼다.
홍성문은 서울대 학창시절 학생작품현상 모집에 자유시 ‘문’으로 입선(1953), 1954년 “문화세계”에 시 ‘부엉이’로 당선하며 데뷔했다. 이듬해 첫시집 “문”(계몽사 1955)을 냈다. 이후 자유시로 여러 예술제에 당선하며 김천에서 왕성히 문학활동을 했다. 星門 또는 以山이란 필명을 썼다. ‘두 개의/ 두리기둥으로 고인 하늘은/매양/그 하늘인데//목이 긴 아가씨 신라가 가고/장삼을 걸친 사나이 고려가 가고/또 아가씨도 사나이도 아닌 이조가 가고/지금은/얼굴을 들지 못하는 누군가/그 문설주에 기대어 울고 있다//’(홍성문, “자하문-직지사에서”. 1961). 홍성문은 1970년대 들며 원래의 전공을 따라 문학보다 조각에 심취했다. 대구교대, 효성여대미술과를 거쳐 영남대에서 미술대학장을 지냈다. 인간애와 생명의 존엄을 형상화한 그의 조각 대부분은 시와 함께 붙어 있다. 김천시청사 중앙현관 앞의 조각 “김향(金鄕)의 노래”(1994)는 이를 대변하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김천시 승격 70주년을 맞은 올해 김천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질 것이다. 민족 자존의식을 공고히 하고 3ㆍ1운동 정신을 통해 민족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이 고장에서 현대문학의 씨를 뿌린 민동선, 이정기, 홍성문 시인을 김천은 기억해야 한다. 기려 마땅하다. 김천에 대한 정서와 애향의식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학으로 계발할 수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는 많다. 이정기, 홍성문 두 시인의 태생지 대항면은 이 고장의 대표적 관광지 직지사를 끼고 있다. ‘사랑이 옷깃을 당기고/우정은 피리를 불어도//내사 두 눈 다 감고/평화의 전통 가슴에 안으며/아리영정 우물에 목을 축이고/아리랑 고개를 혼자 넘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이정기, “아리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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